■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란 제품을 생산한 기업에 제품의 폐기와 재활용에 대한 의무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종전에는 생산자가 제품의 생산과 판매만 책임을 졌지만, EPR은 제품이 소비되고 남은 폐기물의 재활용까지 책임의 범위를 확대한다. 영국은 지난 1월 포장 및 포장 폐기물 EPR(pEPR)을 전담하는 기구 PackUK가 출범해 4월부터 EPR을 시행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업은 포장재 사용 및 처리에 대한 비용을 납부하고 생산하는 모든 포장재에 대한 데이터를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참고: ’25.4 비관세장벽 이슈)
대규모 생산자(연 매출 200만 파운드 이상이며 연간 포장재 취급량 50톤 이상인 기업)는 다가오는 10월까지 RAM(Recyclability Assessment Methodology)에 의거해 포장재의 재활용 가능성을 평가 및 보고해야 한다. 각 기업의 부담금은 이에 기반해 책정되며 납부는 내년 10월부터 시작된다. RAM은 신호등과 같이 빨강(재활용이 매우 어려움), 노랑(재활용이 가능하나 추가적인 처리가 필요함), 초록(재활용이 용이함) 등급을 부여하는 평가 체계다. RAM은 작년 12월 공개된 이후 완성도가 낮고 부정확하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방대한 데이터 보고를 요구해 기업의 부담이 과중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PackUK는 이러한 비판을 수용해 지난 4월 개정된 RAM v.1.1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노랑, 빨강 등급의 축소이다. 이전에 종이 및 판지(paper or cardboard) 포장재에 손으로 지울 수 없는 오염이 있는 경우 빨강 등급이 부여되었으나, 새 기준에 따르면 사소한 얼룩이나 오염은 등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섬유 기반 복합재(fibre-based composite) 포장재는 제품 잔여물이 남아 있는 경우 빨강 등급으로 분류한다는 기준이 삭제되었다. 또한 주로 인쇄에 사용되는 카본 블랙 안료가 포장재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에는 빨강 등급을 부여했으나 이 역시 삭제되었다. EPR 준수를 지원하는 기관인 European Recycling Platform의 John Redmayne은 RAM이 복잡성 때문에 생산자들의 우려가 많았던 시스템이라면서 이번 개정으로 어느 정도 단순해지기는 했지만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당초 예고된 상반기 RAM 평가 결과 보고 기한인 10월까지 시간이 촉박하다는 평이 나온 가운데,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FRA)는 6월 27일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생산자는 2025년 포장재 종류별 상반기 생산량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유지되나, RAM에 근거한 재활용 가능성 평가는 추후 하반기 데이터를 기준으로 추정하는 것이 허용된다. 사실상 RAM 도입을 6개월 유예해 준비 기간을 주었다는 분석이다. 영국 식음료연맹(FDF)은 RAM이 이전에 수집한 적이 없는 방대한 데이터를 요구하기에 이번 조치가 현실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유예 기간을 활용해 정확한 데이터를 준비한다면 효율적이고 공정한 EPR 제도 실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DEFRA는 EPR 세부 사안을 지속적으로 수정, 개선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제도 도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무시하기 어렵다. 기업들이 20억 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게 되어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제시된다.
생산자의 부담이 결국 소비자의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경제적 악영향 외에, 환경적 측면의 비판도 나오고 있다. 식품 패키징 기업 Colpac의 ESG 디렉터이자 환경 운동가인 Talia Goldman은 EPR로 인해 생산자들이 단순히 비용만 우선시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저렴한 플라스틱과 저품질 포장재 사용을 늘릴 것이고, 결국 친환경 포장재처럼 환경친화적인 소재는 외면받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다. EPR의 도입 목적이 폐기물을 감축하고 순환 경제를 구축해 지속가능한 사회를 실현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6월 발표된 포장재 종류별 부담금에 따르면 플라스틱의 대체재인 섬유 기반 복합재의 부담금이 가장 높게 책정된 반면, 플라스틱의 부담금은 13% 인하되었다. Goldman은 현행 요율로는 생산자들이 비용 절감과 지속가능성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환경적인 영향을 지금보다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 고려하고, 징수한 부담금을 재활용 인프라에 투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식품 포장재용 재활용 식별 코드를 제작하는 Polytag의 CEO Alice Rackley는 EPR이 환경 개선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고 기업에 부담만 떠넘긴다고 비판했다.
■ 시사점
생산자 책임 확대는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적 추세의 일환으로, 향후 영국 외 국가에서도 제도 도입 및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한국 식품 수출업체는 단순히 제품의 품질이나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포장재의 재질 선택과 분리배출 용이성까지 전략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 인증을 받은 재활용 가능한 단일 재질 포장재 사용, 라벨 부착 최소화 등을 통해 현지 규제 적합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PackUK 및 환경식품농무부(DEFRA) 가이드라인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포장 규정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필요 시, 현지 유통 파트너사와 협업해 수수료 납부 및 데이터 보고 의무 등 제도적 부담을 사전 조율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 출처
https://www.gov.uk/government/news/recyclability-assessment-methodology-ram-v11